맑고 더운 여름이 다가왔습니다.
지난해 가을, 다니던 직장에서 나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저에게
집주인 아주머니가 아는 어부 아저씨가 있으니 어선을 타보라고 했습니다.
누가 갑작스레 그런 아르바이트를 쉽게 수락할까요? 제가 그랬습니다..
_어선 위에서 바라본 창원 진해항의 저녁 풍경
대학교 3학년, 해양과학기술 아이디어 공모전을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사물 인터넷과 연계한 마리나'라는 테마로, 선박과 IT를 접목해
단순히 마리나가 관광요트의 모항이 아닌 기존 연안어업과
미래형 어업인 외해양식을 위한 기반을 갖추기를 제안했었습니다.
바다의 이용에 관한 대학교 교양강의를 수강하면서 연안에 있는 바다생물을
잡기만 하던 어업을 넘어서서 외해양식을 통해 기르며 연구할 수 있는 어업의 역할은
저에게 매우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한국은 매년 국민들의 수산물 소비량은 증가하는데 반해 어업 인구는 감소하면서
부족한 수산물을 외국산 수입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어업이 1차산업의 한계를 넘어서 4차산업의 물결을 타고 변화한다면
어업 인구의 감소를 막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한국이 수산물을 적극적으로 기르고 관리하는 어업으로 진입한다면
기원전 1만년 경 농경 혁명이 사회 체제를 완전히 뒤바꾼 것처럼,
연안에 새로운 산업구조가 자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_외해양식의 구조
물론 컴퓨터공학 학부생이 바다에 대한 교양강의 하나를 듣고 공모한
제안서는 입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상을 염두에 두었던
저에게 어선에 타보라는 것은 어떻게 되든 필요한 경험의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수락했고 진해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벽을 실감했는데요.
저의 구상은..
1. 한국은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고 사물인터넷 마리나는
IT기술로 해양자원을 활용하면서 어업과 IT기술 모두의 성장을 촉진할 것.
가전제품부터 자동차까지 뻗은 IT산업에 선박도 구성원으로 포함됨으로써
첨단기술을 접목.
2. 단순히 잡기만 하는 어업이 아닌, 기르는 어업을 통해 수입 수산물에 대한
양적, 질적 경쟁력이 높아질 것.
3. 미래어업인 외해양식과 생태계 복원을 위한 바다숲 조성사업을 위해
양식장에 대한 원격 카메라, 원격 구조물 제어, 오염 감지가 가능해야함.
기술적으로 수중에서 안정적인 통신, 동작이 가능한 설비가 필요하기에
새로운 기술적 도전과제.
등이었는데.. 막상 경험해보니 현실은 요구사항을 단 하나로 정리했습니다.
1. 밤새 낙지 잘 잡고, 시세 좋게 잘 팔아서 항구 근처 집에가서 발뻗고 기분좋게 자는 것.
아.. 결국 어부 아저씨가 거기있는 이유는 당장 생계를 위한 것이고. 아저씨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가 아닌 당장의 하루하루에 와닿는 무언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어선에는 아저씨와 저, 단 둘이었습니다. 시즌마다 잡는 수산물이 다른데, 당시에
아저씨는 낙지를 잡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부 아저씨가 저를 필요로
하는 것은 끼니마다 (어선 위에서) 밥준비와 설거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낙지의 미끼인 참게를 주낙봉에 끼우는 작업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라면에 넣었먹은 전날밤 잡은 생낙지..
저의 라면사에서 가장 훌륭한 건더기였습니다..
_참게(위)와 주낙봉에 끼워진 모습(아래) [출처 : 국립수산과학원]
아저씨가 주문한 스티로폼 박스에는 살아있는 중국산 참게 수 백마리가 바글바글했습니다.
낮에는 항구에서나 배 위에서 대개 엄지손가락 크기만한 녀석들을
주낙봉에다가 고무줄로 묶는 작업을 합니다. 기계처럼 미끼를 끼우다가
살짝 따끔하면 손을 잘못놀려 바늘에 찔린 것이고
계속 따끔하면 참게가 제 손가락을 집은 것이고.. 그랬습니다.
첫 날 오후에 배 위에서 작업복을 입고 참게를 끼우는 것까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질 즈음, 창원이나 거제 근해로 조업을 나가니
토를 두번 하고서야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아저씨는 배안으로 들어가
누워 있으라고 하셨지만, 신기하게 토를 하고나면 정신이 매우 맑아졌습니다.
정신이 없어 이미지를 남기지 못했지만, 칠흑같은 밤바다 위에서 멀리 연안의 불빛을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우주에서 지구의 야경을 바라보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쓸쓸하면서도 오묘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_국립수산과학원에 올라온 낙지조업 모식도.
이제부터는 아저씨만의 힘겨운 밤샘이 시작됩니다. 저는 아저씨가 출출할 때
커피나 라면을 끓이거나, 선내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잠들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저씨는 낚시줄을 내렸다가 다시 거두어들이기를 반복하며 잡힌 낙지를
뜰채로 거둬 대야에 넣었습니다. 그런 작업을 새벽 내내 반복하다가 잠드셨습니다.
시작점과 끝점에 전기로 반짝이는 부표를 띄워서 방향을 알 수 있고,
배의 측면에서 바퀴가 공장라인처럼 낚시줄을 돌리며 부표 사이를 왕복하는 것이죠.
사물인터넷을 연계한 마리나.. 그런 건 필요없었습니다. 선박끼리의 무전은 원활하게
이루어지며 조업은 질서있게 이루어졌습니다. 힘든 것은 주낙봉에 참게를 끼우는
번거로움, 즉 핵심은 통신이 아니라 자동화에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밤새 일한 뒤 집에서 주무시고 점심때 다시 배로 돌아와
저와 같이 주낙봉에 낙지를 묶었습니다. 아저씨는 미끼 끼우는 작업만
원활하면 자신도 편하고 미끼가 늘어나니 낙지도 훨씬 많이 잡힐거라 얘기했습니다.
제가 옆에서 봐도 번거로운 미끼 끼우기만 자동화해도 어부 입장에서는 훨씬
생산성이 오르리라 생각되었습니다. 수십년간 쌓인 어부의 경험으로 조업할 터를 잡고,
밤샘 왕복이나 잔손이 많이가는 미끼준비를 자동화한다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술의 이점을 누린다면, 당장 소수의 어획량은 늘어나겠지만
수산물의 전체적인 관리 측면에서는 정답이 아닐 것입니다. 의미있는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바다숲 조성과 외해양식, 결국 멀리 미래를 보며 준비해온 방안 뿐입니다.)
첫날을 그렇게 보내고, 둘째날은 종일 배 위에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밤샘작업으로
피곤해서 선내에서 잠들고, 저도 청록의 바다에 감탄하다 잠들었습니다. 점심시간에
기상해 낙지를 넣은 라면이나 아이스박스에 담긴 반찬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낙봉에 참게 미끼를 준비합니다. 아저씨는 저보다 참게 수십마리가
들어간 바구니 하나를 채우는 속도가 거의 2배 빨랐습니다. 참게를 빨리 끼우고
담요에 덮어 해수를 뿌리지 않으면 게들이 바닷바람에 말라붙어 미끼로써
낙지의 구미를 당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시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밤샘조업을 합니다.
배를 탄지 세번째날 새벽 4시쯤, 먼저 잠에 든 저를 아저씨가 깨웠습니다.
커피나 라면이 드시고 싶은건가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두번째 조업을
막 끝낸 아저씨는 이틀밤 모은 낙지 250여 마리를 진해항 어시장에 팔아야하니
옮기는걸 도와달라 하셨습니다. 아직 잠이 덜깨서 멀뚱멀뚱했지만
TV 프로그램 체험 삶의 현장에서만 보던 새벽어시장을 두눈으로 직관하는 것이
흥미진진했습니다. 정신이 멍한 저와 달리 어부 아저씨들과 식당 아주머니들은
저한테도 랩처럼 들리는 중개인의 말에 집중하며 노련하게 사인을 주고 받았습니다.
250여 마리, 많이 잡은 편이었지만 크기가 작아 마리당 4,600원에 팔렸습니다.
아저씨보다 적게 잡은 다른 어부 아저씨는 낙지 크기가 커서 조금 더 높게
받는 걸 보았습니다. 아저씨는 낙지 시세가 좋을 때면 마리당 7,000원까지 올라가는데
그럴 때가 되면 너도나도 낙지만 잡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겐 4,600원만해도
시간대비 대단한 수익이었는데, 문제는 매번 그렇게 잡을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밤 12시까지 조업했는데 10마리도 안잡혀 일찍 잠드는 날도 있었습니다.
- 2박 3일의 첫조업을 끝내고 어시장에서 찍은 진해항의 아침 일출
경매가 끝나고 아저씨의 지인인 식당 아주머니를 따라 근처 식당에서 배부르게
해산물 요리를 먹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게시글의 서두에도 얘기드린 것처럼
어업을 경험해보고자 찾아왔지만, 아저씨는 지인들에게 저를 공부하는 친구지만
힘들어서 본격적으로 어업을 배우러온 동생으로 소개했는데요.. (틀린 말은 아닌거 같기도..)
어떤 아주머니는 자기 딸은 공무원도 안쳐다본다며.. 배타는 사람은 안 된다는 뜬금없는?
얘기들도 나왔습니다 ~_~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안주거리가 되었지만 밥이 맛있으니 괜찮았습니다.
아, 지금 이 글에서는 아저씨라 호칭하지만 일할 때는 반드시 형님이라 해야했습니다.
모르고 아저씨라고 하면 표정이 진지하게 안 좋아지셨는데요 ^-^..
혹시 아저씨가 이 글을 보신다면.. 마지막으로 지금 여기서 아저씨라 칭해서 죄송합니다.
근데 요즘은 아저씨라는 호칭도 젊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ㅎㅎ
아침을 먹은 후 아저씨와 헤어져 마산으로 돌아와 그날 하루는 달콤한 휴식을 취했습니다.
식당에는 늦은 나이에 뱃일을 배우는 아저씨도 계셨습니다.
조선소가 어려워지고 갑자기 어업을 배우려는 사람이 늘어
배를 내놓으면 금방 팔린다는 쓸쓸한 이야기들도 들렸습니다.
우리나라가 미래먹거리를 낚을 좋은 그물을 준비해내어
언젠가는 풍어기로 진입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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